야간기차여행의 추억_2000년7월 유럽

문득 지난 2000년 유럽여행의 추억이 떠오릅니다.

2000년, 그 해 여름 우리나라 배낭여행족에게는 다른 나라 배낭족과는 다른 뚜렷한 공통적인 특징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그 배경은 바로 한 권의 책에서 기인합니다. 당시에 우리나라 배낭여행계에 획을 그은 배낭여행 가이드북이 나왔는데요. 바로 ‘유럽 100배로 즐기기’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의 특징은 기존의 단순나열식 가이드북과는 달리 구체적인 여행 일정을 제시하면서 지역간 이동방법과 유명한 장소를 찾아갈 수 있는 방법(대중교통편이나 걸어서)을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존의 우리나라 관광 가이드북이 팩키지 여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디에 유명한 무엇이 있다고만 설명하는 반면 정작 그곳엘 찾아가는 구체적인 설명은 불충분했죠. 그러던차에 자신들이 직접 유명한 곳까지 찾아 가야 했던 배낭족들의 요구를 그대로 반영한 이 책의 히트는 폭발적인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책에서 제안한 복장이나 안전수칙이 그대로 교과서가 되어서, 그 해 유럽을 찾은 수많은 한국 배낭족들이 그대로 따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이 책에서는 복장으로 창이 넓은 모자, 선글라스, 뒤로 매는 큰 배낭, 현지 시내 관광시에 들고 다닐 작은 배낭가방, 반바지, 신발은 농구화 스타일의 발목이 높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내 관광시 소매치기 등에 대비한 안전수칙으로 복대를 하지 말 것과 작은 배낭을 앞으로 메라고 권고했는데요, 그 해 여름, 위에서 언급한 복장에  ‘이스트 팍’ 가방을 앞으로 메고 유럽을 배회하는 사람은 무조건 한국 배낭족이었습니다.

얼마나 이 책에 나오는 권고를 그대로 따라 했냐면, 런던 ‘타워브리지’는 야경이 특히 멋있다고 쓰여 있는 바램에, 유독 타워브리지 주변에서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리며 배회하는 한국 배낭족들이 많았을 정도였습니다. 문제는 런던의 경우 여름에 밤 10시가 되어야 어두워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이들이 원하는 야경사진을 찍고 숙소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노린 불량배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고요…. 그래서 당시 초저녁에 서글서글한 눈매를 한 경찰들이 한국 배낭족들을 일찌감치 민박집으로 돌려 보내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제 기차이동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배낭족들은 숙박비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야간이동을 자주 합니다. 저녁에 기차를 타서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에 아침에 도착하는 방식이죠.  위에서 말한 그 책에서 야간이동시에 추가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침대칸이나 쿠젯(간이침대)을 이용하기 보다는 그냥 일반 좌석으로 되어 있는 보통칸을 이용하는 방법을 권고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던 대다수 우리 착한 배낭족들은 그 책의 권고대로 보통칸을 이용했습니다. 당시 일본 배낭족들이 거의 쿠젯(간이침대)칸을 이용했던 것과는 대조되는 현상이었습니다.

침대칸이나 쿠젯을 이용할 경우에는 기차 승무원이 여권과 기차표를 거둬가서 중간에 국경등을 넘어갈 때 필요한 수속을 대신 해주고, 아침이 되면 깨워주면서 여권과 기차표를 돌려주는 편리함이 있지만, 보통칸의 경우 수시로 사람들이 문을 여닫고, 여권과 기차표 검사를 하는 등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럽의 국경을 넘는 기차는 우리나라와 달리 보통칸도 2~3명이 마주보고 앉는 좌석 2개 마다 칸막이가 되어 있고, 문이 있습니다. 한쪽에 긴 복도가 있고요……)

피곤에 지친 배낭족들을 노리고 새벽녘에 배낭 등을 훔쳐가는 일이 많았는데, 이 책에서는 이때를 대비해서 야간기차이동 방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문에 박스 테이프를 길게 여러 번 붙인다. 헐렁한 문이 저절로 열고 닫히는 것도 방지할 수 있고, 문이 열릴 때 박스테이프가 내는 소리에 잠에서 깰 수 있다. 그리고 배낭은 안쪽 선반에 올려둔다. 이 때 자전거 자물쇠 등을 활용해서 기차선반에 묶어 놓는다.  그래도 깊은 잠에 빠지면 못 일어 날 수 있으니, 스테인레스로된 컵을 배낭에 달아놔라. 여행시 물컵이나 밥그릇이 될 수도 있고, 유사시 그 흔들리는 소리로 도난을 방지할 수 있다.’

4인에서 6인으로 즉석에서 멤버를 구성한 한국 배낭족들은 기차가 출발하지 전에 일찌감치 한 칸씩 차지하고는 위에서 언급한 공사를 치렀습니다. 마치 교육을 받고 온 듯이 익숙하게 배낭은 선반에 자물쇠 채우고, 배낭에 스테인레스 컵 달고, 문에 박스 테이프 뜯어 붙이고……

7월 중순쯤 되면 유럽의 기차 승무원들이나 다른나라 배낭족들에게 한국배낭족의 이와같은 특이한 행동이 인지(학습)됩니다.  이쯤되면 승무원들의 경우 기차표 검사를 위해 문을 열다가, 박스 테이프 뜯어지는 소리가 들리면 ‘오 꼬레’하고 그냥 넘어갑니다.  한국 배낭족인줄 아는거죠. 그리고 한국배낭족의 경우 기차를 무임승차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이미 학습이 된 겁니다.  기차표 검사를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죠. 그래서 아침에 기차를 내리면서 지난 밤에 한번도 검사를 하지 않아서 푹 잘 잤다는 소리를 하는 배낭족들의 기쁜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기억은 스위스에서 이탈리아를 넘어 가는데, 국경지대가 알프스 산맥이다 보니 기차가 자주 급회전을 해야 됐는데요…. 그럴때 마다 한국 배낭족들이 탄 기차의 경우 앞 칸부터 맨 뒷 칸까지 스텐인레스 컵이 딸랑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돌림노래처럼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럴때 승무원이나 다른나라 배낭족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고개를 저으면서 '오 꼬레!'

벌서 10년이 다되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한국 배낭족들은 어떻게 여행을 하는지 문득 궁금해 집니다.

by 노마드 | 2008/03/11 20:39 | 여행 이야기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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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Tabipero at 2008/07/21 22:07
재미있네요. 유럽에 가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문에 테이프 붙이는 것과 배낭에 컵 매다는게 좋은 아이디어 같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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